심층 칼럼 · #13 / 50 · 지갑 · 오라클 · 보안 · 실생활 결제
계정 추상화(ERC-4337 · EIP-7702): 12단어 비밀 구절 없는 스마트 지갑의 시대
패스키(지문·얼굴 인식)로 서명하고 스테이블코인으로 가스를 내는 지갑 혁명
블록체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공포는 ‘종이에 적어 둔 12단어 복구 구절(시드 구문)을 잃어버리면 평생 모은 자산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점과, ‘달러(USDC)를 보내려는데 수수료로 쓸 ETH가 100원어치도 없어서 송금이 안 된다’는 황당한 경험입니다. 이 두 가지 장벽을 허무는 기술이 바로 계정 추상화(Account Abstraction)입니다.
1. 왜 기존 이더리움 지갑(EOA)은 불편했을까
이더리움에는 원래 두 종류의 계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개인키로 직접 서명해 쓰는 일반 계정(EOA)이고, 다른 하나는 코드로 움직이는 스마트 컨트랙트 계정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쓰던 메타마스크 같은 지갑은 모두 일반 계정(EOA)이었습니다.
일반 계정은 구조가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열쇠(개인키) 하나가 곧 전부라서 열쇠를 도둑맞으면 전 재산을 털리고, 열쇠를 분실하면 재발급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거래를 한 번에 하나씩만 승인해야 해서 토큰을 바꿀 때 ‘한도 승인(Approve)’과 ‘교환(Swap)’을 두 번 따로 눌러야 하고, 수수료는 무조건 그 체인의 기본 가스 토큰(ETH 등)으로만 내야 합니다.
2. ERC-4337과 페이마스터(Paymaster): 앱이 수수료를 대신 내거나 USDC로 내는 구조
2023년 본격화된 ERC-4337 표준은 이더리움의 기본 규칙을 고치지 않고도 모든 사용자의 지갑을 ‘프로그래밍 가능한 스마트 컨트랙트 지갑’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구조에서 가장 반가운 조연은 페이마스터(Paymaster, 대납자)입니다.
페이마스터가 있으면 사용자는 지갑에 ETH가 한 푼도 없어도 자신이 가진 USDC나 USDT로 수수료를 낼 수 있고, 심지어 게임이나 앱 회사가 사용자의 가스비를 뒤에서 대신 내주어 ‘무료 송금’을 구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더리움 시티의 Celo 구역이 스테이블코인으로 바로 가스를 낼 수 있게 한 것이나, Plasma 구역이 기본 USDT 송금 수수료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런 대납·추상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3. 패스키(Passkey) 서명과 펙트라 업그레이드의 EIP-7702
스마트 지갑의 또 다른 장점은 은행 앱처럼 스마트폰의 지문 인식(Touch ID)이나 얼굴 인식(Face ID), 즉 패스키(Passkey)를 열쇠로 쓸 수 있다는 점입니다. Abstract, ZKsync Era, Starknet 같은 ZK 구역이나 Base의 스마트 월렛은 처음부터 이 기능을 깊숙이 내장해 12단어를 종이에 적지 않고도 즉시 지갑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여기에 2025년 5월 이더리움 펙트라(Pectra) 업그레이드로 도입된 EIP-7702는, 새로 스마트 지갑으로 이사할 필요 없이 기존에 쓰던 일반 지갑(0x 주소)에 그대로 스마트 컨트랙트 기능을 덧붙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 거래를 한 번의 클릭으로 묶어 실행(일괄 처리)하거나 특정 한도 안에서만 자동 결제를 허용하는 일이 기존 지갑에서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4. 누구나 웹2 앱처럼 쓰는 온체인 도시를 향하여
계정 추상화가 성숙할수록 사용자는 내가 지금 어느 블록체인을 쓰고 있는지, 가스 토큰이 무엇인지조차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이더리움 시티의 구역마다 소비자 앱과 게임이 빠르게 늘어나는 배경에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지갑 기술의 진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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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도시를 읽는 데 도움을 주려고 쓴 해설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이 글의 사실은 2026년 10월 기준이며 바뀔 수 있습니다. 틀린 곳을 보시면 문의로 알려 주세요.